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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석원 각자를 찾아서 ​ 서촌 답사의 묘미 중 하나는 아래 그림의 바위에 새겨진 '송석원' 각자가 현재의 서촌에서 어디쯤 있었던 것인지를 추리하는 것입니다. ​ 아래 그림은 송석원시사(옥계시사)의 시모임을 그린 송석원시회도. 바위에 '송석원'이라는 글자가 보임. ​ 그림에서 아래쪽을 흐르는 개천은 수성동 계곡에서 흘러나오는 개천으로, 윤동주 하숙집 앞에 있는 현재의 '옥인길'이 이 개천을 복개한 것임. ​ ​ ​ 1950년대에 촬영한 송석원 각자 사진(추사 김정희 글씨) 1950년대까지는 아래와 같이 바위에 각자가 있었으나 그 후로 행방이 묘연해졌습니다. ​ ​ ​ 친일파 윤덕영이 새긴 '벽수산장' 각자 왼쪽에 보이는 '송석원' 각자 ​ ​ ​ ​ 2024. 1. 16.
서촌의 화가 겸재 정선이 그린 서촌 풍경을 찾아서 ​ 비 갠 직후의 인왕산을 그린 인왕제색도 (국보, 이건희 기증 컬렉션) ​ ​ ​ 안평대군의 비해당 터에 있던 기린교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수성동') ​ ​ ​ 청휘각 (정선의 장동팔경첩 중 '청휘각') ​ ​ ​ ​ 2024. 1. 16.
1927년 경성시가도와 1930년대 서촌 지역 항공사진 ​ ​ ​ ​ ​ 아래 사진은 지금의 자하문로가 1927년에 복개되기 전 백운동천의 모습 ​ ​ 아래 사진은 백운동천을 건너는 자수궁교의 사진. 현재의 '자교교회'가 이 다리의 이름을 딴 것임. ​ ​ 2024. 1. 16.
1930년대 서촌의 '모던 보이',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의 우정 ​ ​ 1930년대 경성(서울) 시내를 산보하는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의 모습을 당대의 신문삽화가이자 화가였던 이승만이 그린 캐리커처입니다. 당시의 전형적인 '모던 보이'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캡션에는 “이색적 멋장이 이상과 구본웅”이라 적혀 있습니다. 구본웅은 어릴 적 사고로 곱사등이여서 이를 가리고자 셜록 홈즈가 입는 코트를 입고 있고, 이상은 봉두난발을 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 일제 시대 서촌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시인 이상과 화가 구본웅은 궁합이 잘 맞았던지 서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데 평생을 지속하는 우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삶과 우정은 아래 블로그 글에 잘 나와있습니다. 당대 서촌과 서울의 분위기 역시 가늠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 https://blog.naver.. 2024. 1. 16.
18세기의 서촌 사람 장혼의 삶 ​ ​ 아래 기사에는 18세기 조선에 태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장혼의 삶이 어떠했는지가 잘 소개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당시의 시대 분위기와 서촌의 분위기도 느껴볼 수 있습니다. ​ ​ ​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116026002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3)송석원시사의 인재 장혼 위항시인들이 주관하는 백일장인 백전(白戰)에 수백명이나 참석할 수 있었던 까닭은 송석원시사의 중심인물이었던 천수경이나 장혼이 한양 인왕산에서 커다란 서당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항시인 이경민이 편찬한 위항인들의 전기집 ‘희조질사(熙朝 事)’의 천수경편에 의하면 “한달에 60전을 ... www.seoul.co.kr ​ ​ ​ 2024. 1. 16.
18세기 사람 장혼의 눈에 비쳤던 서촌의 옥류동 지역 아래 글은 1786년(정조 10년) 중인들의 시 모임인 옥계시사(송석원시사)를 결성하여 활약했던 장혼(張混, 1759년 ~ 1828년)이 남긴 서촌의 옥류동 지역에 대한 평가입니다(최종현·김창희 저, 오래된 서울, 동하, 2013, 221~223쪽에서 인용). 200여년 전에 서촌 지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상상하면서 오늘날의 서촌을 보면 또 다른 느낌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 ​ -------------------- ​ 옥류동은 인왕산의 명승지 가운데 한 구역이다. 옥류동의 형세는 덮은 듯이 서북쪽을 숨기고 입을 벗린 듯이 동남쪽이 트여 있다. 등 뒤로는 푸른 절벽의 늙은 소나무가 멀리 바라보이고 앞쪽으로는 도성의 즐비한 집들이 빼곡하게 내려다보인다. 평평한 들판이 오른쪽에 얽혀 있고, 긴 산등성이가 .. 2024. 1.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