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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색즉시공

by dongmong 2024. 4. 27.

 

 

제가 올려드렸던 아래의 지난 글에 많은 분들이 댓글로 답변을 달아주셨는데요,

 

이 드레스가 무슨 색으로 보이시나요?

 

결과를 집계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황금색 + 흰색 : 11명

2) 검은색 + 푸른색 : 3명

3) 황금색 + 푸른색 : 3명

4) 기타 : 1명 + 3명

( 4번 기타의 3명은 때와 장소에 따라 색깔이 다르게 보인다는 분들입니다)

 

지난 답사 뒷풀이 때는 위의 1, 2, 3번이 대략 1/3씩 나뉘었는데, 이번에는 1번이 많이 나왔습니다.

(대치도서관 강연 때는 2번이 가장 많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에 따라 다른 색깔로 보이는 이유는 뇌과학(또는 인지과학) 쪽 연구를 통해 밝혀졌습니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설명입니다.

 

우리 뇌는 경험을 통해 같은 색도 조명에 따라 달리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이 경험을 투영해서 색채를 인식한다.

 

비슷한 현상이 드레스 사진을 볼 때도 일어난다. 이 경우에는 사람에 따라 드레스가 어떤 빛깔의 조명을 받고 있다고 여기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밝은 태양빛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드레스가 흰색과 금색으로 보인다. 백열등처럼 노란 조명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드레스가 파란색과 검은색으로 보인다.

사람마다 조명빛을 다르게 추정하는 것은 각자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이다.

살면서 경험한 일들 때문에 나는 세상을 지금 인식하는 것처럼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 사진을 처음 보는지, 본 적이 있는지에 따라 색깔 인식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 사진을 몇 번 보았던 사람은 처음 보는 사람에 비해서 흰색과 금색이라고 판단할 확률이 높다. 또, 나이가 많을수록 흰색과 금색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같은 사진이 사람의 경험에 따라 달리 보이는 것이다.

 

이상의 설명은 불교의 가르침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생각나게 합니다.

 

위 드레스는 대표적인 사례일 뿐 다른 모든 색깔도 결국 동일합니다.

지금 우리 눈 앞에 사과가 있을 때 “사과는 빨갛다”라는 말에 모두가 동의한다 해도 실제로 각자가 느끼는 빨간색은 조금씩 다릅니다.

사실 사과를 가만히 보면 그 안에는 빨간색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검은색, 초록색, 누런색 등 총천연색이 섞여 있습니다. 이를 모두 반영해서 우리 각자가 조금씩 다른 색깔로 느낍니다.

 

불교의 가르침 '색즉시공'에서 '색(色)'이란 우리 눈에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의미하는 총칭으로 쓰인 것입니다.

색깔이 우리의 인식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대표해서 칭한 것입니다.

때문에 “당신의 색깔을 밝혀라”, “색깔을 분명히 해라” 이런 말들이 흔히 쓰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처럼 가장 기본이 되는 인식인 색깔조차 사람마다 다르다면, 우리의 '도덕'이라든가, '상식', '신념'처럼 추상적인 대상의 인식에 이르면 오죽할까요.

 

이처럼 사람들은 실제의 세계가 아닌, 자기 경험을 투영해서 인식한 세계를 살아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경험은 고유하기에, 우리가 일생에 걸쳐서 형성한 우리의 마음도 고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투영한 세계, 우리가 인식한 세계도 고유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망막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 망막에 투영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75억의 사람이 있는데, 각자가 75억 개의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색즉시공,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객관적인 실체[실實]가 아닙니다. '실(實)'한 것이 아니기에 결국 공(空)한 것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남에게 '객관적인 실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공허감과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까요?

객관적인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적극적인 의미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원효대사의 가르침이 그렇습니다.

 

대승불교의 인식론은 원효대사 당대인 7세기에 이미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결론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마음이 투사하는 것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실(實)한 것이 아니기에 공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을 바탕으로, 원효대사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가르쳤습니다(책 150쪽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데, 대체로 이 구절을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정도로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는 부족한 해석입니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일체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가 됩니다. 그리고 원효대사는 이 가르침을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말씀한 것입니다.

 

일체의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는 말은, 우리 마음이 이 세상을 실제로 지어내고 지탱한다는 말입니다.

그에 따라 원효대사는 지옥계, 아귀계, 축생계, 인간계 등이 실제로 이 땅 위에 존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여러분은 이를 보지 못하시나요? 그렇다면 눈을 뜨고 잘 보십시오.

가만히 보면 길모퉁이에서 축생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귀다툼을 벌이는 아귀들도 볼 수 있고, 가끔은 지옥계를 살고 있는 악마도 볼 수 있습니다.

 

축생의 마음은 이 세상을 축생계로 보면서 살아가고, 그러한 세상을 계속 지탱해 갑니다.

인간의 마음은 이 세상을 인간계로 보면서 살아가고, 그러한 세상을 계속 지탱해 갑니다.

결국 이 지상세계가 실제로 어느 쪽이 될지는, 어느 쪽 마음이 주도하는가에 달렸습니다.

아직까지 이 지상세계가 완전히 축생계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과 그에 따른 노력이 쇠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드레스의 색깔 사례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마음이 투사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어낸 것이지요.

 

그러므로 ‘색즉시공’이 맞습니다.

우리가 보는 '색', 즉 우리 눈에 들어와 우리 망막에 맺히는 모든 정보는 실(實)한 것이 못되며 공(空)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공허감과 허무주의에 빠진다면 그건 엉뚱한 결론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과 노력이 도리어 소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