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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신영복, 마지막 잎새, 주역

by dongmong 2018. 3. 29.

《주역》에는 ‘마지막 잎새’를 연상케 하는 괘가 하나 있다.

23번째 괘인 박剝의 상을 보면, 양효가 맨 끝에 하나 외로이 달려 있어 영락없는 마지막 잎새의 상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이 마지막 잎새는 이제 곧 떨어지고 말 것이며, 이를 지켜보는 군자는 그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음기운이 1효에서부터 계속 팽창하면서 양기운을 하나씩 박탈하며 올라오는 것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이제 곧 하나 남은 양효 마저 떨어지고 나면, 온 세상이 암흑천지로 바뀌고 말리라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다.

결국 박剝의 때에 처한 군자가 하나 남은 6효의 양을 쳐다보는 심정은 ‘마지막 잎새’를 바라보는 심정과 유사할 수밖에 없다. 그의 심정은 암담함 그 자체일 것이다.

이러한 때에 군자는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

이 박剝괘는 고故 신영복 선생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괘이기도 하다.

신영복 선생은 1963년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에서 경제학 교관으로 근무했다.

그러던 중 26세의 나이인 1968년에 당시 군사정부에서 조작한 간첩사건으로 인해 북한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구속되어 사형을 선고 받았다.

이후 20년 세월 동안 수감 생활을 하다가 46세가 된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할 수 있었다.

그는 수감 중에 가족과 지인들에게 엽서를 보냈는데, 그 엽서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재소자에게 허용된 엽서의 분량에 제한이 있었으므로, 그는 철필로 먹물을 찍어서 또박또박 깨알 같은 글씨를 박아 썼다.

그 때문에 엽서를 본 사람들은 글의 내용에 앞서 그 형식으로 인해 더 짙은 느낌을 갖게 된다고 입을 모은다(지금도 그의 책을 통해 엽서의 사진을 볼 수 있다).

20대의 젊은이가 전혀 사실이 아닌 누명을 쓴 채 사형언도를 받고 20년을 갇혀 있었다면, 웬만한 사람이면 폐인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의 엽서가 담고 있는 내용은 그가 20년의 세월에 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 내용은 그의 조용하면서도 견고한 정신의 영역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렇게 엽서는 그 형식과 내용이 한데 어우러져서 읽는 이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작은 엽서 속에 한자 한자 또박또박 박아 쓴 글씨는 그가 인고해온 힘든 하루하루인 듯 그 글을 결코 범상한 마음으로 대하지 못하게 했다.

그의 이 ‘옥중서체’는 나중에 ‘처음처럼’ 소주의 브랜드로 쓰이게 되었다.

그의 엽서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묶여져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문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필자는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때부터 선생의 독자였지만, 생전에 그 분을 뵙지는 못했다.

2016년 초 부음을 듣고 빈소에 찾아뵀을 때 벽면에 비추어 돌아가는 슬라이드 사진을 통해 비로소 뵐 수 있었다.

그때 필자에게 처음 떠오른 생각은 ‘심광체반心廣體胖’이었다.

군자가 어떤 사람인지 묘사하는 표현이 몇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심광체반心廣體胖이다. 군자는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에 그 영향이 몸과 얼굴에도 나타난다는 말이다.

필자는 사진을 통해 선생을 뵙고서 군자가 심광체반心廣體胖하다는 것이 어떤 말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선생의 모습은, 웬만한 사람이면 폐인이 되었을 인생경험을 한 분이라고는 믿기 어려웠다. 나중에 알고 보니 선생이 20년을 갇혀 있다 막 출소하던 날도 바로 그런 모습이셨기에 마중나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20년이라는 암흑의 세월, 그 긴 세월 동안 그를 견디게 하고 지탱해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중의 하나가 박剝괘 6효사의 ‘석과불식碩果不食’ 네 글자였다.

이 네 글자는 ‘신영복의 《주역》’이라고 할 수있는 구절이다.

아래는 신영복 선생의 그림과 글씨다.


<출처: 한겨레신문 2012년 1월 27일, ‘[신영복의 그림 사색] 석과불식’에 실린 그림을 전재>

그림에 ‘석과불식碩果不食’ 네 글자가 선명하다.

‘석과불식碩果不食’은 “씨 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말이다.

碩(석)은 ‘크다’는 뜻도 있지만, ‘충실充實하다’는 뜻도 있다. ‘충실充實하다’는 말은 과실果實의 알맹이가 단단하게 들어찼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석과碩果’는 충실하게 영근 과실을 의미하며, 이러한 과실을 골라 씨 과실로 쓰는 것이다.

박剝괘는 주역의 64괘 중에서 가장 암울한 상황이기에 박剝의 길이 6단계에 이르면 군자에게는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석과碩果’ 하나만이 남게 된다.

이 ‘석과碩果’ 하나를 남기는 것도 쉽지 않다. 그 때문에 군자는 이 ‘석과碩果’ 하나를 남기기 위해 앞서 4·5단계에서 지난한 투쟁을 벌여야 한다.

군자는 이미 자신의 기반을 박탈당한 상태이므로 홀로 남아 투쟁하고 홀로 모진 박해를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군자가 모든 기반을 이미 잃은 마당에 자신의 이상과 가치도 마저 포기해버린다면 일신의 편안함 정도는 보장될 것이다.

하지만 군자는 박해를 감수하면서 끝내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지켜내며, 이렇게 지켜진 그 이상과 가치가 삭풍을 견디며 옹골차게 영근 것이 바로 ‘석과碩果’ 하나인 것이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 종자를 먹어버린다면 농부가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군자 역시 굶어 죽어도 석과碩果를 남기고 죽는다. 그 석과碩果를 먹어버린다면 군자가 아니기에 그럴 것이다.

신영복 선생은 ‘석과불식碩果不食’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석과불식’은 한 알의 작은 씨 과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 알의 씨 과실은 새봄의 싹이 되고 나무가 되고 숲이 되는 장구한 여정으로 열려있는 것입니다. 결코 작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영복, 《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돌베개, 2015, p.423)

모진 세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군자는 ‘석과碩果’라는 희망 하나를 품고 견뎌왔던 것이다.

나무는 지금 최악의 때를 맞은지라 말라 죽겠지만, 씨 과실을 땅에 떨어뜨려서 새로운 나무를 꽃 피우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계속 낳음으로써 숲을 이루는 장구한 여정까지를 내다보는 것이다.

군자가 이것 하나를 내다봤기 때문에 모든 것을 박탈당하는 고난과 치욕의 시기를 견뎌온 것이다.

신영복 선생은 감옥에 갇혀 있던 20년 세월 동안 석과불식 네 글자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그의 옥중편지는 그가 이 세상에 남길 수 있는 석과였다.

그 씨 과실은 이후 싹을 틔우고 나무로 자랐으며 숲을 이루게 되었다.

옥중편지 모음집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감명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둘 선생의 주위로 모여들었는데, 그 모임은 선생의 출소 직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모임은 선생의 서거 후에 ‘더불어숲’이라는 이름의 정식 사단법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앞으로 계속 선생의 가르침을 이어갈 것이다.

선생은 살아생전에 성공회대학교에서 동양고전 강좌를 진행했는데, 강의 마지막 날은 언제나 석과불식으로 끝을 맺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석과불식으로 끝내는 이유를 생각해달라고 당부하셨다.

그는 자신의 강의 역시 하나의 석과로서 싹을 틔울 수 있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석과불식’ 네 글자가 최고의 인문학이라고 생각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최고의 인문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영복, 《담론: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 돌베개, 2015, pp.422-423)

어찌 달리 인문학이 있으랴…

- 동양학연구소(eastology.org)

* 이 글은 강병국, 『주역독해』, 위즈덤하우스, 2017에서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 글의 출처가 “동양학연구소(eastology.org)”임을 밝히신다면 다른 곳에 전재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