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變應萬變(불변응만변)은 “불변은 만변에 응한다”는 뜻이다. 불변은 만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만변에 기꺼이 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변화에 대처하는 군자의 자세를 표현하는 말로 널리 쓰이는데, 백범 김구 선생이 1945년 해방을 맞아 귀국하기 전날 저녁 이 문구를 써서 남긴 족자가 다음과 같이 전하며, 베트남의 민족영웅 호찌민의 좌우명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 다섯 글자는 주역의 철학을 함축한 글이기도 하다.
《주역》은 ‘시중時中의 도道’로서 변화의 원리에 대해 말하는 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주관을 버리고 변화에 순응할 것만을 강조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주역》이 말하는 변화의 핵심적인 원리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세 구절을 꼽자면, ‘유유왕有攸往’, ‘유부有孚’, ‘정貞’함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옛 점인들이 수천 년간 인간세상을 관찰한 결과 이 세 가지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더라는 말일 수 있다.
가고자 하는 바의 목적이 있을 것, 그 추구하는 목적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을 것, 그와 같은 믿음을 줄곧 굳게 지키는 태도를 갖출 것, 이렇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셋 중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가고자 하는 바의 목적[有攸往]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목적의 구체적 내용은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구체적 내용이 무엇이건간에 그것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며, 진리를 이 세상에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할 것이다.
이처럼 가고자 하는 바의 목적은 군자가 큰 과오(대과大過·28)를 범한 순간에도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며, 광명의 횃불이 꺼지고 만 절체절명의 순간(리離·30)에도 국면을 역전시키는 동력이 되어주고 있다.
이처럼 군자가 가고자 하는 바의 목적은 각 괘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준다.
그런데 이러한 군자의 목적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군자가 매번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들 때 그 길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매번 변한다. 하지만 그 중간 ‘목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군자의 ‘목적’은 불변하는 것이다.
이처럼 군자에게는 불변의 목적이 있기에 매번 새로운 길이 나타날 때에도 자기 중심을 잡고 유연하게 목표를 변경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군자는 불변하는 한 가지로 이 세상의 천태만상에 대처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군자는 군자가 아닐 것이다.
군자는 불변하는 한 가지가 자기 안에 있기에 능히 나와 다른 남을 포용해서 그와 보조를 맞출 수 있다.
만약 군자에게 확고한 하나의 중심(불변의 진리)이 없다면 오히려 남과 보조 맞추기를 두려워할 것이다. 자기 중심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남과 함께 하는 것은 자기 붕괴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용》이 말하는 ‘화이불류和而不流’ 역시 군자에게 불변하는 하나의 중심(불변의 진리)이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 때문에 군자는 자신 있는 태도로 천변만화하는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주역》에서 군자가 ‘시중時中의 도道’에 따라 만변萬變을 끌어안을 수 있는 이유는 불변하는 한 가지가 있기 때문이니, ‘불변응만변不變應萬變’ 다섯 글자는 그대로 주역의 철학이 되는 것이다.
- 태극사상연구소(hansasang.org)
* 이 글은 강병국, 『주역독해』, 위즈덤하우스, 2017에서 발췌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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