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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주역학자가 말하는 태극기와 일장기의 차이 (태극기의 의미)

by dongmong 2020. 8. 19.

 

 

여기 태극기가 있습니다.

 

 

태극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기이기에 많은 한국인이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의외로 태극기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태극기가 상징하는 바를 일장기와 비교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기 태극기와 일장기가 있습니다.

 

 

국기는 나라의 상징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 국민이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그러면 태극기와 일장기 중에서 태극과 붉은 해를 직접 비교해보겠습니다.

 

 

이처럼 두 나라 국기는 공통적으로 원을 중요한 상징으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원은 완전함을 상징합니다.

 

일찍이 카를 융은 원이 인간의 영혼, 인간의 마음의 온전한 전체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이지러짐이 없는 온전한 전체,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원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원은 오래전부터 인류의 여러 문명에서 신의 상징으로 쓰였습니다. 이지러짐이 없는 온전한 존재가 신이지요, 그러므로 인류의 여러 문명에서 원이 신의 상징으로 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두 나라 국기에 공통되는 원의 이미지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입니다.

원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의 상징이겠고, 무신론자에게는 진·선·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신론자에게 있어서 신을 대신하는 것이 진·선·미입니다. 진·선·미, 이지러짐이 없는 온전한 가치. 거짓이 아닌 진리, 악이 아닌 선, 추함이 아닌 아름다움, 진·선·미입니다.

 

이처럼 원이라는 것은 신을 믿는 사람에게는 신,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에게는 진·선·미의 상징이기에 중요한 상징인 것입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태극과 붉은 해를 한번 비교해보겠습니다. 그러면 차이점이 보입니다.

 

 

태극은 건과 곤이 맞물려 순환하면서 둘이서 함께 전체로서의 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일장기의 붉은 해는 건이 단독으로 원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 점은 아주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태극기의 태극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닙니다. 우리 우주의 존재원리인 대대의 원리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 대대待對: 서로 의지하는[待] 동시에 서로 대립한다[對]. 대립 관계에 있는 두 존재가 서로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하는 관계이기도 하다는 뜻. )

 

대립하는 두 개념을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는데요, 예를 들어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영광과 좌절, 이런 대립하는 두 개념을 생각해보면, 단지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 하면 어느 한쪽이 없다면 다른 한쪽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빛이 없으면 어둠이 존재할 수 없고, 어둠이 없으면 빛 역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기쁨이 없으면 슬픔이 존재할 수 없고, 슬픔이 없으면 기쁨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대립하는 두 개념은 사실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탱하는 셈입니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우주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이 모두 대대를 이루면서 존재한다고 봤습니다. 우주의 결이 그렇게 새겨져 있다고 읽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같은 대대, 이 대대들 중에서 궁극의 대대, 가장 궁극적인 대대가 음과 양이라고 파악했습니다.

그 음과 양이 서로 대립하는 동시에 의지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 태극입니다.

 

태극을 보시죠, 태극의 건과 곤이 바로 음과 양인데, 그 음과 양이 서로 대립하는 동시에 의지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 그것이 바로 태극입니다.

 

 

그러한 대대관계를 잘 표현하지 않았나요?

 

태극의 건과 곤을 남과 여의 관계로 보셔도 됩니다. 애증이 교차하는 부부의 모습을 상상하시면 태극이 대대관계를 표현하고 있다는 걸 이해하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처럼 태극은 건과 곤이, 음과 양이 서로 맞물려 돌면서 둘이서 함께 전체로서 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단독으로 원을 이루는 게 아니라 둘이서 함께 원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이 중요하지요. 단독으로는 완전한 원을 이루지 못하고, 둘이서 함께 할 때라야 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가 국가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태극을 채택했다는 것, 이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태극이 상징하는 ‘대대待對의 철학’을 긍정한다는 말입니다.

대대의 철학, 그것은 나와 다른 남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남을 긍정하는 것.

 

대대는 서로 대립하는 두 가지, 건과 곤이 사실은 서로를 도우면서 의지하는 관계임을 말합니다.

이는 나와 대립하는 상대방, 음과 대립하는 양, 건과 대립하는 곤이 단지 대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는 관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즉 나와 대립하는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긍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혼자서 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남과 함께, 둘이서 함께 맞물려 돌면서 전체로서의 원, 완전함의 상징인 원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대의 철학’이고, 태극기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장기는 어떠한가?

 

 

일장기에서도 원은 신을 상징하거나, 진·선·미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 원을 건이 단독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나 혼자서 진·선·미를 이룬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진·선·미의 공간에 나와 다른 남이 함께 할 자리가 없게 됩니다.

일장기는 나와 다른 남을 긍정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건 사실 심각한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이 아닌 진리, 악이 아닌 선, 추함이 아닌 아름다움을 말하는데 그 기준은 오로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와 다른 둘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되면 일본 국민은 모두 그 하나의 기준에 동의해야만 합니다.

그 하나의 기준에 동의하면 진리요, 선이요, 아름다움이지만, 동의하지 않으면 거짓이요, 악이요, 추함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해서 이 일장기는 집단주의, 전체주의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다원주의 사회에서 국기를 만든다면 이런 국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일장기는 19세기 후반 일본에서 메이지유신을 일으킨 군국주의자들이 제정한 국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욱일기만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욱일기는 끊임없이 문제로 제기되고, 우리가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는데, 일장기 자체가 집단주의와 전체주의를 강요하고 있다는 것, 이 점에 대해서도 반드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봅니다.

 

왜냐 하면 상징이라는 것은 아주 힘이 센 것입니다. 특히 나라의 상징인 국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국기는 그 나라 국민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지지만, 일단 만들어지고 나면 그 나라 국민들의 지향점을 설정하게 됩니다.

그 나라 국민들이 지향해야 될 지점을 설정하고, 국민들로 하여금 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교육하게 됩니다.

그런데 일장기는 지금 일본 국민들에게 집단주의에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본문화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화和의 문화’라고 합니다.

화和, 조화를 이룬다고 할 때의 ‘화和’입니다.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문화.

개인의 개성을 중시하기보다는 집단의 질서와 안녕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일본문화입니다.

 

일본이 이런 화和의 문화를 지녔기 때문에 일장기가 나라의 상징으로 채택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장기가 나라의 상징으로 공식적으로 채택되고 나면 더더욱 집단주의를 조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선·미의 기준은 오로지 하나다, 그리고 그 하나와 다른 둘은 있을 수 없다고 가르치는 국기,

이러한 국기가 공식적인 국기로 채택이 되고 나면, 상징은 아주 힘이 세기 때문에 이 힘이 센 상징, 국기라는 상징이 낳는 부작용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에 이지메 문화가 그토록 강하게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장기는 전체가 하나여야 한다, 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번듯한 모습을 한 다수가 있을 때 그 다수에 속하지 못하는, 그 번듯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소수자들은 이지메를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번듯한 다수에 속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를 괴롭히는 이지메 문화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국가적 재난상황이 닥칠 때마다 일본에서는 항상 이지메 문제가 등장합니다.

왜냐하면 국가적인 재난상황에서는 피해를 입은 소수자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피해를 입은 소수자는 번듯한 다수와는 다른 존재들입니다.

이런 존재들, 피해를 입은 소수자가 생기면 항상 이들을 괴롭히는 이지메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환자와 가족이 사는 집에 밖에서 누군가가 돌을 던지는 일이 끊임없이 발생합니다. 벽에다가 모욕하는 낙서를 휘갈겨 써놓기도 하고.

 

그리고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등교해야만 했습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어느 대학의 부속고등학교인데 그 대학의 한 교수가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단지 그 부속고등학교일 뿐인데 그 부속고등학교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지나가면 거리나 상점 등에서 "코로나, 코로나"라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모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한 학생들이 교복 대신 사복을 입고 등교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간호협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호소를 했는데,

무슨 일인가 하면 간호사들과 그 가족들에 대한 이지메가 발생하고 있다,

현장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이 택시를 타려고 하면 승차거부를 당하고,

간호사 자녀들이 보육원에 등원하지 못하도록 거부당하고, 또는 등원할 경우에는 왕따를 당하고,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사람들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요,

일선 현장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들이 격려를 받아야 할텐데, 이지메를 당하는 일이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고 항상 재난상황에서는 반복되어왔습니다.

예를 들어 2011년에 있었던 동일본대지진과 뒤이은 원자력발전소 사고로 피해를 입었던 동북 지방민들 역시 집단괴롭힘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번듯한 다수에 속하지 못하는 소수자들을 괴롭히는 이지메 문화가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일본 사회 내에 불만이 있을 때 일본 내의 타자에게 불만의 화살을 돌리는 일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본 내에는 가령 우리 재일동포들, 홋카이도 지방의 아이누인들, 남쪽의 오키나와인 등 일본 내의 타자들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끊임없이 핍박을 받았습니다. 일본 사회 내에서, 일본 역사에 걸쳐서 끊임없이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관동대지진 당시에 조선인들이 우물물에 독을 탄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고, 우리 조선인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벌어졌던 끔찍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예전의 일만이 아니라, 지난 동일본대지진 당시에도 유사한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우리 재일동포 관련한 유언비어들이 상당히 등장했습니다. 다행히 가라앉긴 했는데 상당히 긴장해야 했던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도 일본의 우익들이 집요하게 우리 재일동포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혐한 분위기를 끊임없이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역사를 보면, 국내의 불안이 아주 심해질 경우 국외로 불만의 화살을 돌리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일장기가 욱일기로 변하는 것이지요,

 

 

이 일장기는 언제고 욱일기로 팽창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오로지 일본만이 진리요, 선이요, 아름다움이라고 주장하는 일장기가 공식적인 국기인 한, 언제든지 이 붉은 해가 팽창할 수 있습니다. 붉은 해가 팽창하는 모습이 욱일기입니다.

 

왜냐 하면, 일본과 다른 외국은 진·선·미가 아니라는 얘기이지 않습니까?

일본만이 진리요, 선이요, 아름다움이고,

일본과 다른 외국, 타자, 내가 아닌 남은 진·선·미가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고 이 일장기는 욱일기로 팽창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나라와 일본의 시민사회가 이 일장기의 문제를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욱일기만이 문제가 아닌 것이지요. 일장기도 군국주의의 유산입니다.

 

일장기는 원래 일본이 2차대전에서 패망하면서 일장기도 법적인 근거를 상실했던 것입니다. 그랬다가 1999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장기가 일본에서 법제화되었습니다. 공식적인 국기가 된 것입니다. 얼마 되지 않은 일입니다. 1999년이니까.

이때 공식적인 국기로 법제화되지 말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본의 시민사회가 나서서 이 국기, 일장기를 바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일장기는 언제고 욱일기로 팽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반드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렇게 봅니다.

 

 

일장기 얘기가 길어졌는데 다시 태극기로 돌아가보면,

태극기의 철학이 대대의 철학이라면, 태극기가 상징하는 문화는 ‘화이불류和而不流’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이불류和而不流’가 무슨 뜻인가 하면, ‘화和’, 조화를 이루되, ‘불류不流’, 휩쓸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 않는다…

 

이에 비해서 일장기의 문화는 ‘화和의 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장기의 문화에는 ‘불류不流’,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조화를 이루는 것만이 절대가치라고 얘기합니다.

그에 비해서 태극기가 말하는 문화는 ‘화이불류和而不流의 문화’입니다.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화이불류’가 어디서 나온 말인가 하면, 공자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공자님 제자 중에 자로가 있습니다. 자로는 용맹함을 자랑으로 여기는 제자인데, 자로가 어느 날 공자님께 “강한 것이 어떤 것입니까, 강하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라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대답에서 이 ‘화이불류’가 나온 것입니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대개는 갑옷을 입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 그것을 강하다고 대개 얘기한다, 하지만 그보다 강한 것이 있으니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 강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은 갑옷을 입고 죽기를 마다하지 않는 것을 강하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니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 강한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공자가 말씀하신 ‘화이불류’의 강함, 이것이 태극의 강함입니다.

태극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보실까요?

 

화이불류和而不流에서 ‘화和’, 조화를 이루었다는 것은, 태극에서 건과 곤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서 전체로서 원을 이룬 모습, 그것이 ‘화和’입니다.

그리고 ‘불류不流’,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은, 건과 곤이 조화를 이루지만 휩쓸려서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를 잃지 않는 것이지요.

 

건과 곤이 조화를 이루어 같이 원을 이루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불류不流’입니다. 휩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태극은 조화를 이루지만 휩쓸리지는 않는다는 이 역동성, 아주 다이나믹한 역동성이지요, 조화를 이루지만 휩쓸리지 않는 모습, 이런 모습을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를 흔히 ‘다이나믹 코리아Dynamic Korea’라고 많이 말합니다. 그런데 ‘다이나믹 코리아Dynamic Korea’를 이루는 그 다이나믹함이 어디서 오는가?

그 원동력이 바로 태극의 강함, 태극이 지닌 역동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한류의 매력이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중에서 중요한 요소가 저는 이 다이나믹한 역동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이 역동성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화이불류和而不流’가 아닌 ‘화和의 문화’에는 ‘불류不流’가 없지요.

조화를 이루되 휩쓸리지는 않는 것이 태극기가 상징하는 문화라면, 일장기가 상징하는 ‘화和의 문화’는 조화만을 강조할 뿐 휩쓸리지 않는다는 것이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일장기가 상징하는 ‘화和의 문화’에는 역동성이 나타나기 어렵습니다.

 

이 차이, 역동성의 유무가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의 차이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보면 일본이라는 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4만8천불이 넘고, 인구가 1억 2천만이 넘습니다. 이런 일본이 문화적으로 아시아를 제패하고, 일본문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본이 어째서 한국문화에 뒤지게 되었는가? 그 차이가 무엇인가? 저는 이 ‘화和’와 ‘화이불류和而不流’의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문화에는 ‘불류不流’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일장기에는 ‘불류不流’가 결여되어 있다, 이것이 왜 문제인가?

일장기가 상징하는 ‘화和의 문화’에서는 한번 형성된 집단의 흐름, 집단적인 흐름이 한번 형성되고 나면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경로의존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 경로의존성: 과거에 만들어진 제도, 구조, 규격 따위가 현 시점에서는 최선이 아닐 수 있음에도 그것을 계속 사용하는 현상 )

 

경로의존성이 있으면 당장은 질서정연하고 안정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장은 좋아보입니다.

그렇지만 경로의존성 때문에 결국은 정체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이나믹함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일본경제는 ‘잃어버린 20년’이라고 과거에 얘기하다가 이제 어느덧 잃어버린 30년이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정체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단지 경로의존성을 넘어 경로고착성을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됩니다.

 

최근에 일본에서 극우파들이 준동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일본 사회 내부에서 불안감이 점점 높아가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저는 사실 재일동포들이 걱정이 됩니다.

또한 일장기가 욱일기로 변하는 일이 또 벌어지지 않을까, 국내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 국외로 불만의 화살을 돌리는 일이 또 벌어지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일장기와 달리 우리 태극기는 ‘대대待對의 철학’과 ‘화이불류和而不流의 문화’를 상징합니다.

일장기와 반대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 때문에.

태극이 지닌 역동성, 화이불류의 문화에서는 당장은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워보입니다. 그러나 길게보면 건과 곤이 맞물려 순환하면서, 다이나믹하게 변화하면서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역동성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우리 한류,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한류의 매력이나, ‘다이나믹 코리아’로 상징되는 한국문화가 지닌 역동성의 원천은 이처럼 태극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을 요약하면, 우리나라 국기인 태극기는 철학으로는 ‘대대待對의 철학’, 문화로는 ‘화이불류和而不流의 문화’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태극기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제 강의를 들으시고 태극이 지닌 의미, 그 상징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제가 올해 출간한 신간도서, ‘막힘없는 삶을 위한 주역공부’에 더 많은 내용이 들어있으니 참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이 글은 같은 제목의 강연 내용을 글로 정리한 것입니다. 동영상으로 보실 분은 유튜브의 강연 동영상을 참고하세요.

   동영상 링크: youtu.be/vYj5aFX-Tx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