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은 ‘신화의 힘’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흥미있는 발언을 합니다.
사람들은 말하지요, 우리 모두가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라고. 나는 우리가 진실로 찾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생각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찾는 것은 살아 있음에 대한 체험이라고 생각해요, 전적으로 물리적인(physical, 육체적인) 수준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이 우리의 가장 깊은 내적 존재와 실체 안에서 공명할 수 있도록, 우리가 살아 있음에 대한 황홀감(rapture)을 정말로 느낄 수 있도록이요.
People say that what we're all seeking is a meaning for life. I don't think that's what we're really seeking. I think that what we're seeking is an experience of being alive, so that our life experiences on the purely physical plane will have resonances within our own innermost being and reality, so that we actually feel the rapture of being alive.
(※우리말 해석은 번역서에 실린 해석이 아니라 제가 다시 한 것입니다)
젊은 시절에 읽었던 캠벨의 이 말은 저를 단번에 사로잡았습니다.
그 뒤로 저는 과연 그럴까? 를 곰곰 생각했는데, 한 10년 쯤은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캠벨은 우리 인간이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가 아니라는 굉장한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보기에 우리 인간이 찾는 것은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 있음에 대한 체험(an experience of being alive)’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 있음에 대한 체험을 구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물리적인(육체적인) 수준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이 우리의 가장 깊은 내적 존재와 실체 안에서 공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가 살아 있음에 대한 황홀감(rapture)을 정말로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캠벨이 말하는 “우리의 가장 깊은 내적 존재와 실체(our own innermost being and reality)”란, 제가 ‘오십에 읽는 주역’에서 말씀드린 우리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성性’(영성)입니다.
“전적으로 물리적인(육체적인) 수준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이 우리의 가장 깊은 내적 존재와 실체 안에서 공명”하는 순간이란,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진선미의 순간입니다.
고통이 세월과 함께 지나갔을 때,
시간이 본질이 아닌 것들, 변덕스러운 우연, 사건, 사실들을 다 흩어버리고 났을 때,
그때도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몇몇 소중한 기억들의 순간입니다.
책에서 저는 뉴욕 맨해튼의 샌드위치 가게 사장님 부부의 은퇴식을 사례로 들었습니다.
그 은퇴식에서 눈물의 합창이 울려 퍼지던 순간이 바로 진선미의 순간입니다.
당시 가게 사장님은 “제 인생에 이런 순간이 있을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고 하시며 감격한 모습으로 서 있었고, 부인은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간이 우리 삶의 본질을 이루는 소중한 순간이며, 진선미의 순간입니다.
캠벨은 이럴 때 우리가 ‘살아 있음에 대한 체험(an experience of being alive)’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럴 때 “전적으로 물리적인(육체적인) 수준에서의 우리 삶의 경험“이 우리 안의 영성과 공명한다는 것이며, 그와 같은 경험을 통해 우리가 살아 있음에 대한 황홀감(rapture)을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순간은 캠벨에게 있어서 우리가 찾는 ‘삶의 의미’를 대체할 만큼 굉장한 순간입니다. 인생에서 맞이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인 것이지요.
이러한 캠벨의 해석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진실로 찾고자 하는 것이 ‘삶의 의미’가 아니라는 말은 계속해서 의문으로 남았습니다. 이 의문을 해결하는 데 10년쯤 걸렸는데…
지금 와서 보면 캠벨은 소음인으로 보입니다.
캠벨이 사용한 표현인 ‘rapture(황홀감)’는 사로잡히는 감정으로서의 황홀감을 말합니다.
마침 캠벨은 책의 본문을 시작하면서 “나는 남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주제라고 해서 관심을 두는 것은 신용하지 않아요. 내가 신용하는 것은 어찌어찌 하다보니 사로잡히게 되는 주제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전형적인 소음인의 특성입니다.
저는 소음인이라서 캠벨이 말하는 황홀감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제가 사로잡힌 주제에 몰입해서 깊이 파들어가다가 그동안 모르던 사실을 깨닫게 될 때, 그동안 안개에 쌓인 듯 흐릿하던 것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볼 때 저는 황홀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매우 깊은 만족감이며 기쁨인데, 그러한 기쁨이 소음인으로 하여금 계속 깊이 파들어가게 만드는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물론 다른 체질도 황홀감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것이 삶의 의미를 대신하는 것이라고까지 쓰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다른 체질인 분들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
캠벨과 달리 카를 융은 인간이 의미 없는 삶을 견딜 수 없다고 봤습니다.
융은 마침 분석심리학을 전개하면서, (철)학자의 기질이 그의 사상 체계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 캠벨이 말하는 ‘살아 있음에 대한 황홀감’을 느끼는 체험의 순간은, 그대로 삶의 의미를 느끼는 순간이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단지 황홀감에 깊이 만족하는 캠벨 본인의 기질 때문에 이러한 순간이 삶의 의미를 대체하는 것이라고까지 다소 극단적으로 서술했다고 봅니다.
오늘 이 글은 지난 번에 사람이 꼭 행복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썼던 글과 궤를 같이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사람 마다 인생을 지탱하는 주요 동력(느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행복감으로 느껴지고,
어떤 사람에게는 뿌듯함으로, 충일감으로 느껴지며,
어떤 사람에게는 희열이나 황홀감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다양한 느낌은 모두 삶의 의미를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다르며, 서로 다른 느낌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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